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한 크레올어인 차바카노(Chavacano)어에 관심이 있는 까닭에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다니다가 자주 마주친 된 글들이 있다
"필리핀이 스페인어를 학교에서 필수로 배웠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
"필리핀 정부가 스페인어를 공용어의 지위에서 끌어내린 것은 개탄할 만한 처사이다, 이제 스페인어를 기억하는 것은 노인들뿐이다."
라는 식의 의견도 꽤나 보인다
스페인어는 모국어 화자 수로 따지면 영어를 뛰어넘으며, 구사자 수는 많지만 사실상 중국, 대만 내에서만 쓰이는 중국어와는 다르게 여러 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다
그렇다면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도 유창해진다면 그만큼 국가경쟁력이 강해질 거라는 생각에 그런 의견들이 나오는 것일까?
사실 그 뿐만이 아니다
꼭 차바카노어와 관련된 영상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스페인 식민 통치가 남긴 유산을 대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자세에는 우리가 느끼기에 위화감이 드는 묘한 무언가가 있다
타갈로그어에 남아있는 스페인어 어휘들을 보고 신기해하는 중남미 사람들에게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 형제들이라며 반가워한다던지, 우리는 아시아의 라틴 민족이라고 외친다던지
우리 생활 속 남아있는 일본 식민주의의 잔재라 하면 무조건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의 풍토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럴 때면 필리핀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댓글들을 보면 볼 수록 경악스럽고 머리 위에 물음표가 백개쯤 떠올랐다
아니 대체 왜?
스페인이 밉지도 않은가??
스페인어가 공용어 자리에서 밀려난건 민족 자긍심이 고취될 만한 일 아냐???
우리나라처럼 뼈에 사무치게 옛 식민지배역사에 치 떨려하는 건 오히려 드문 케이스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그래도 이해가 안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들의 스페인성(性)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힘껏 포용하는 듯한 저 자세는 뭐람
저래서는 마치 스페인 식민시절에 향수라도 있는 사람들 같잖아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같았는데 답을 알고보니 생각보다 전형적인 문제였다
실마리를 잡게 된 것은 인터넷에 저런 발언들을 남기고 다니는 사람들의 족적을 따라가보니 상당수가 세부 사람들이었다는데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어와 스페인 문화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얘기가 길어지면 항상 타갈로그어와 타갈로그 문화가 얼마나 지겨운지를 말했다
세부를 중심으로한 비사야 지역의 사람들은 공용어로서의 타갈로그어의 위치, 그리고 타갈로그 문화가 필리핀 문화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것에 대하여 강한 불만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래서 세부에서 타갈로그어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면 무시를 하고 영어로 물어보면 그제서야 알려준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반면에 스페인어 죠앙 우리는 아시아의 라틴!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colonial mentality 운운하면서 왜 아직도 식민지 백성처럼 구느냐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타갈로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사실 필리핀 뿐만이 아니다
디테일만 다르지 큰 틀에서 보면 정말 흔한 일이다
오랫동안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한반도의 사람들과는 달리 지구 상에는 서로 상이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 편의에 따라 그어진 경계선에 따라 얼떨결에 같은 국가로 묶여버린 경우가 많다
인도에서는 영어를 공용어의 지위에서 내리고 힌디어를 유일한 공용어이자 국어로 지정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타밀나두 주를 위시한 남인도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서 실현되지 못했다
타밀어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힌디어나 영어나 똑같이 foreign한 언어이고 둘 중에 하나를 배워야한다면 당연히 쓸모가 더 많은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미문화보다는 힌디어를 위시한 북인도 문화가 더 자신들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북인도의 힌디민족주의자가 들으면 뒷목을 잡고 화를 낼 소리다 우리는 다 같은 인도사람이거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어떻게 같은 나라 말이 옛 식민국의 언어만큼 foreign하냐고 어처구니 없어하겠지
알다시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들의 공용어는 영어 또는 불어이다
특정 국가 내에서 주류 또는 과반수의 위치를 점하는 민족이 있다한들 그 민족이 자기네 말을 국어로 지정하려 하면 다른 민족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금 이게 머선129를 외치기 때문이다
물론 토착어가 성공적으로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한 나라도 있다
탄자니아, 케냐 같은 나라들은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지정하고 있으며 영어와 더불어 스와힐리어가 공용어로서 국민들에게 잘 받아들여져서 널리 쓰이고 있다
왜냐하면 특정 민족/종족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지않고, 스와힐리족 자체는 소수집단이나 스와힐리어가 무역어로 발달되고 사용된 까닭에 해안가를 따라 넓은 지역에 퍼져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러 민족/종족 간의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언어였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국어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어를 표준화한 인도네시아어를 국어로 채택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인도네시아는 자바족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자바중심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바족의 정치문화경제적 영향력이 막강하지만 자바어는 국어가 되지못했다
말레이어는 인도네시아에서 (적어도 그 당시 기준으로) 말레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소수이면서도 무역어로서 이 섬 저 섬에서 널리 통용되는 언어이었기 때문에 국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말레이어가 아닌 자바어가 그 지역 일대의 lingua franca였다면 자바어가 인도네시아의 국어가 되었을까?
제 아무리 무역어이자 통용어로 널리 쓰였다한들 다른 민족들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영국 제국주의 시기 케냐에서 기쿠유어나 마사이어 같은 특정 네임드 종족어가 공용어로서 장려되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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